ways of seeing
   
작성일 2016/05/25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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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ys of seeing] 응답하라, 도시 주택 (제1편)

 
 
 
2016년 05월 통권 061호 | 사람과 글 人ㆍ文
 
 
 
 
 
 
 
 
 
  [리드]

   도시 주택이라는 주제를 학교에서 처음 배운 것이 언제인지 기억하시는지. 초등학교 4학년이 되면 사회 시간에 도시와 촌락의 주택 문제를 숙제로 받는다. 학습 문제의 빈칸에 “도시는 사람이 많이 모여들다 보니, 주택이 부족해 아파트도 짓고 산을 깎고 재개발도 한다.”고 답을 쓰면 다음 단원으로 넘어간다. 도시의 양상은 계속 바뀌고 있고 그 정의도 분분하지만, “인구가 밀도 높게 모여 사는 곳”은 공통의 바탕을 이룬다. 물론 아무 데나 도시라며 억지 이름을 끌어 붙이는 일도 여상하만, 그래도 사람들이 좁은 땅에 무척 많이 모여서, 서로 부비며 산다는 그 현상으로부터 도시의 온갖 즐거움이 생겨나고, 온갖 문제도 생겨난다. 그러므로 그 사람-시민들이 사는 곳-집은 도시의 출발이자 끝이다. 세계적 밀도를 자랑하는 이 땅의, 10살 때부터 배운 도시 주택 문제의 정답 풀이는 끝났는가. (대학을 졸업해야 인간답게 산다고 주입받아) 좋은 대학을 진학하며 시작되는 서울 살이는, 사람이 반지하나 창이 없는 고시원에서도 살 수 있음을 처절하게 학습하는 과정이거나, 급속한 재산 증식의 과정이거나, 아파트라는 스탠더드. 언제나 행정과 정치와 재계와 학계의 첨예한 화두인 듯 보이지만, 정작 시민들에게는 돈에 맞춰 고르는 일밖에 허락되지 않는 어떤 것. 도무지 우리 시민은 자신의 집에 대해서 고민할 필요가 -질문할 권한이 없(거나 제한되어 있)다. 앞으로 2회에 걸쳐 도시 주택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그것은 초고층화되는 아파트, 빌라라는 이름의 연립 주택, 단독 주택, 산이 많은 우리 지형에 대한 대응, 전통의 보존과 개발의 논리, 또는 도시가 되려고 아파트 단지를 새로 짓는 일이나 허허벌판에 호화 주상복합 신상품을 세우는 일도 있다. 이 갖가지 질문을 관통하며 우리가 도시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계속 답하려고 했고, 그 답을 통해서 삶을 질문을 하려고 했다. 어쩌면 헛된 일이다. 시민은 주어진 보기에서 답을 고르는 것만이 허락되고, 문제의 출제자는 보기 중 무엇을 골라도 범주를 넘어서지 않도록 정교하게 작업 중이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어진 질문에 정답(correct answer)을 고르는 일이 아니라, 끊임없이 서로 응답(response)하는 일, 응답으로 질문을 이어 나가는 일이 아닐까. 제각각 해법은 다르지만 본바탕은 하나로 연결되는, 도시 주택에 대한 질문과 답의 과정을 생각해 보는 지면이 되기를 기대한다.  


   고층 아파트를 향하여

   "오늘은 아시아 선수촌 아파트(1986년, 연재 제1회 참조) 후에 한 십 년 동안 생각하고 작업했던 것을 얘기할 텐데, 거의 주거가 많습니다. 그 첫 번째가 1985년에 설계한 초고층 아파트예요. 아시아 선수촌 아파트를 실시 설계(기본 설계를 바탕으로 공사에 필요한 도면을 작성하는 과정)하는 도중이었는데, 대한주택공사로부터 설계 공모에 지명을 받았습니다. 아파트 단지는 아니었어요. 그 전까지는 대개 12층 쯤을 아파트의 가장 높은 규모라고 짓다가, 앞으로 아파트를 초고층으로 짓는다면 어떤 문제가 생길 건가, 어떤 아이디어가 필요할 건가에 대한 테스트를 해 보려고 한 것 같습니다. 25층 아파트의 모델을 제시하는 일이었어요. 요즘이야 25층은 초고층에 끼지도 못하지만, 우리 나라에서나 그런 것이고, 사실 주거로서 상당히 고층이라고 할 수 있지요. 우선 구조의 문제로서, 층수가 높아지면서 그 전까지 보편적이던 벽식 구조로는 안 되는 거죠. 기둥을 박아서 기둥 구조하고 벽식 구조를 합쳤습니다. 이 구조를 어떻게 외관으로 드러낼 건가를 고민했습니다. 보와 기둥이 이루는 그리드그리드 한 칸마다 두 층이 들어가게 했어요. 25층을 모두 표현하면 너무 많아 보이니까 두 층이 하나로 보이게 한 겁니다. 위쪽에다가 공중 놀이터 만들고 옥상 정원도 뒀어요." 
 
 
 
 
 
상계 4단지에 시범적으로 실현된 초고층 아파트 입면, 1989년 준공. 입면의 격자는 구조를 드러낸다. (뒤쪽의 동들과 비교해 보면 그리드가 확연하다.) 고층의 어린이들이 바깥과 단절할 것을 우려해 16~18층 사이를 터서 어린이 놀이터를 두었으나 결국 소음에 대한 민원으로 폐쇄되었다. 사진 제공 공동주택연구회.  

 
 
 
 
 
 
   공중 놀이터와 옥상 수영장, 그리고 실험

   "그 공모전에 참가한 다른 곳의 안과는 전혀 다른 개념이었습니다. 구조의 질서가 밖으로 드러나는 형태를 고려했기 때문에 당선되었다고 생각하는데, 막상 집을 짓지는 못했습니다. 주공에서 문제로 삼은 것이 편복도였습니다. 프라이버시가 보호되지 못한다는 거예요. 이 때가 그 동안 아파트를 편복도식로 짓다가 계단식으로 바꿔 갈 무렵이었으니까… 왜 도로 되돌아가느냐는 거지요. 나는 어떻게든 편복도를 해 보자 고집했고요. 그러면…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까지 오는 사이에 자꾸만 스치잖아요, 서로 마주보기도 하고. 그런데 주공에서는 그 마주 보는 게 불편하다는 거예요. 한 개 동만 시범으로 제시하긴 했지만 일종의 단위로서, 나중에 여러 동으로 구성할 것을 미리 고려했습니다. 아시아 선수촌에서처럼 세 동이 묶여서 하나의 작은 단위가 되도록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몇 년 후에 누가 ’어, 그 건물 상계동에 있던데,’ 그래요. 그래서 알게 되었어요. 나도 모르게 달랑 한 동을 지어 놨더라고요."
 
 
 
조성룡, 초고층 아파트 모델 평면, 1986년. 처음에는 옥상에 롤러 스케이트장과 수영장(오른쪽)도 계획했지만 실현되지 못했다. 옥상 수영장이나 롤러스케이트장보다 오히려 그런 고급 시설과 복도식 통로(왼쪽, 빗금 부분)가 공존한다는 현상이 더 기이하고 불편한, 그런 시대로 접어든 것이겠다.   
 
 
 
 
 
 
   땅의 모양을 따르는 마을, 마을의 모양을 따르는 삶
  
   "이게 몇 년인가? 화북지구.… 1995년. 제주도에 처음 짓는 주공 단지였을 거예요. 아파트가 드디어 제주도에도… 상륙하게 된 겁니다. 주택공사 공모에서 3등으로 떨어졌어요. 고가의 주택 단지는 아니었고, 초등학교가 단지 가운데 있는, 일종의 근린 주구(neighborhood unit) 규모였습니다. 제주도는 기후가 육지와 다르잖아요. 한라산이 가운데 있기 때문에, 경관도 크게 다릅니다. 이 아파트는 남향이 아니라 북향이에요. 화북이 어딨냐면 조천 가는 길, 북쪽 바닷가입니다. 이 동네를 가 보니 오래된 집들이 모조리 바다를 향해 있어요. 한라산에서 내려오는 바람을 막아야 되는 거지요. 거기 사람들이 오래 살아온 대로 바람을 뒤로 막으면서 바다로 열리는 것이 이 땅에 맞는 성격이라고 보았는데, 심사하는 분들에겐 읽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평범한 일자형이 당선되었으니까요.”
 
 
 
 
조성룡, 제주 화북 단지 배치도. 북쪽(위)이 바다가 되고, 남쪽(아래)가 한라산 방향으로, 인근의 오랜 마을 형상을 따랐다.
 
 
 
 
 
   “그래도 재미있었어요. 각 구역마다 정해져 있던 밀도가 답답할 정도로 높아서 한계는 있었지만, 여러 시도를 조금씩 해 봤어요. 복도형의 이로운 점을 활용하려고 편복도를 벽에서 떼서 공중 통로처럼 만들기도 했고, 복층형 유니트도 제안했고, 제주는 바람이 거세니까 거실의 발코니는 안으로 들였어요. 실은 아시아 선수촌의 저층(low rise) 버전이라고 할 수도 있을 텐데요. 커뮤니티의 문제, 그러니까 어떻게든지 그 마을 안에서 자그마한 공동성이 발현이 되도록 만드는 얘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이 방향의 또 다른 시도가 북촌, 가회동 11번지예요." 
 
 
  
조성룡, 제주 화북 단지 엑소노메트릭. 작은 평형의 서민 아파트 단지일지라도 단독 주택으로 이루어진 마을처럼 풍성하고 지속되는 공동체를 담아 낼 수는 없을까? 15평형, 18평형, 25평형으로 구성된 2,400세대 단지를 설계하면서 던진 질문이다. 언뜻 ㅁ자형의 클러스터가 반복되는 듯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다양한 생활을 담아내도록 조금씩 변형을 주는가 하면, 복도와 계단, 마당 등 공적 공간들을 세심하게 계획해 옛 골목을 닮으려 했다.
 
 
 
 
 
   북촌이라는 마을

   "북촌 이야기를 먼저 좀 하자면, 북촌이라는 건 역사가 오래지요. 조선 시대 한양에 도읍이 정해질 때부터 종로 북쪽에 생긴 마을입니다.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경복궁에 터를 잡으면서(1394년) 자기 뜻에 가담하고 따라온 이른바 공신들한테 궁 주변 땅을 나눠 줍니다. 요즘 볼 수 있는 윤보선 고택(이 집 자체는 조선 말에 지어진 것이다)처럼 넓은 사대부집이 있고 그 주변에 그 가신의 작은 집이며 노비들 초가집도 들어서면서 북촌이 형성됩니다. 서촌도 비슷하지만 북촌은 바로 뒤에 북악이 있다 보니 경사가 급해서 물길이 많습니다. 삼청동으로 내려오는 중학천이라는 물길이 있고, 동쪽으로는 대학로로 흐르는 대학천도 있지만 중간에도 실같은 물길이 많았어요. 북촌은 물길이 얽힌 지역이고 그 사이사이에 집들이 자리잡은 거예요. 옛날부터 다들 물길 따라서 오가던 게 북촌 길이 되었고, 그러다보니까 꼬불꼬불하고 좁은 겁니다.”  
 
 
 
 
 
 <한양전도>(부분), 1780년. 조선이 도읍으로 삼은 한양은 산으로 둘러싸인 땅이다. 북악과 인왕산에서 물길(푸른색)이 여러 갈래로 내려오다 청계천으로 합수한다.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의 굵은 물길을 지금 지도에 겹쳐 보면 삼청로, 율곡로3길, 윤보선길, 북촌로, 계동길 등과 거의 틀림이 없다. 
 
 
 
 
 
   “일제 강점기에 들어, 1930년대 쯤에 이것이 해체됩니다. 신분이라는 게 없어지면서 큼직하게 차지한 사대부 땅을 쪼개서 집장사들이 거기다 도시형 한옥을 짓는 거죠. 지금 우리가 보는 북촌의 한옥 다수는, 전통적 의미의 한옥이라기보다는 근대기에 지어진 상업용 주택이라고 보면 되요. 땅을 워낙 잘게 자르다 보니까, 담도 지을 틈이 없어서 그냥 방의 벽이 담이 되어 버리죠. 물론 이런 한옥은 서울의 여러 지역에 많이 남아 있지만, 북촌은 다른 동네에 비해서 궁 옆이라 역사의 맥이 통한달까? 일제가 우리 조선을 점령하기 전부터 청계천 이남에 모이기 시작하면서, 남촌을 근거로 활동했다면 그 때까지도 조선 사람들은 북촌을 중심으로 생활을 이어 갔잖아요. 그런 것이 가치가 되어서, 지금 우리가 전통 마을이다, 한옥 마을이다, 이렇게 말하는 관심이 형성되는 겁니다. 관광 자원을 활용해야 되는 시대에 와서, 여러 미디어의 힘을 입어서 뜨게 된 거죠."
 
 
 
 
 
 
 
 
제주 바닷가의 옛 마을에서 지붕(방)과 담은 별개다. 돌로 쌓은 담은 마당을 감싸며 마을길로 굽이친다. (위 사진) 하지만 좁은 땅에 고밀도로 들어서야 했던 북촌의 옛 마을에서는 지붕과 방의 벽이 바로 담이 되며 동시에 길을 이룬다. (아래 사진) 멀리 중앙고등학교가 보이는 풍경은 지금은 중간에 4~5층의 빌라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이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정문 옆으로 은행나무도 보인다.
 
 
 
 
 

   북촌 한옥의 어제와 오늘
 
   "1970년대 말부터 서울 종로 근처에 있던 여러 명문 고등학교들이 강남으로 옮겨 가기 시작합니다. 여의도 이후에 드디어 영동 지구, 그러니까 강남 개발이 시작이 되지요. 그런데 당초에 예정했던 것보다 개발이 좀 늦어지니까, 학교를 강제로 이주시킵니다. 이른바 명문이라는 걸 이주시키면 사람들이 따라갈 거라는 전략이었을 거고, 그건 맞아들어간 거 같애요. 80년대까지 삼성동에서 서초동꺼지, 강남의 주된 택지 혹은 상업 용지 부근에, 남학교건 여학교건, 우리가 알 만한 북촌에 있던 학교들이 이사를 갔습니다. 그 무렵을 본격적으로 강남이 빨리빨리 개발되기 시작한 시기라고 보죠. 그러고 나니까 북촌에 무슨 일이 일어났냐면, 집집마다 담벼락에다 시뻘건 글씨로 못 살겠다, 이런 게 막 붙어요. 학교는 떠나 버리고, 보존 지구로 묶여 있으니까 집도 고치질 못하고. 남쪽으로 떠났던 사람들은 집으로 한 열 배는 벌었대는데 여기 집값은 엉망이죠. 상대적 박탈감, 그런 겁니다. 1990년대 초 얘깁니다. 서울시에서는 도저히 민원의 압박을 못 견디겠다고, 한옥 지구를 해제하려고 해요."
 
 
 
 
북촌 한옥마을, 1990년. 가회동 등 북촌과 사직동 등 서촌의 한옥 보존 지구는 1980년 지정되었고 주민들의 끊임없는 반발과 민원에 따라 올림픽이 끝난 후인 1989년부터 대거 해제되기 시작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도 북촌이나 서촌 길가에 “우리도 아파트를 원한다”는 현수막이 흔히 나부꼈다. 당시 이 사진이 게재된 매체에는 “주민들이 스스로를 파괴하기 시작했다”는 캡션이 붙었는데, 오늘날 스스로를 나서서 파괴하는 일은 이름을 날리던 아파트 단지들에서 일어난다. (공간 1991년 7월호에서 인용)
 
 
 
 
 
   도시 한옥에 대한 숙제

   그래도 풀리기 전에 뭔가 대비책은 마련해야겠다 싶어서, 당시 서울시에 민간인 별정직으로 있던 강홍빈 박사(당시 기획관리실 시정연구관)가 서울대 김광현 교수한테 전화를 했어요. 건축가들을 좀 소집을 해라, 스터디 그룹을 빨리 만들어 달라. 그래 김광현 교수가 나한테 연락을 해 갖고 내가 여섯 명인가 불러 모았어. 북촌 한옥 보존 지구 해제가 되고 여기에 현대 생활에 맞는 집을 새로 짓는다면 어떤 것이 가능할까, 그런 모델을 구하는 작업을 한 거죠. 의미있다고 생각했어요. 중앙고등학교 올라가는 입구 옆, 11번지에 속해 있는 도시형 한옥 자리에 뭔가 제안을 하는 게 서울시에서 준 숙제예요. 한 달 동안에 부리나케 했어요. 그 때는 좁던 길이 지금 고개로 넘어가는, 가회동 큰길이 되었죠."
 
 
 
 
원서동은 창덕궁 후원의 서쪽으로, 조선 시대에는 원동(苑洞)이라 불렸다. 1960년대 항공 사진(왼쪽)에서 도시 한옥이 가득하던 원서동 77번지는 1990년대 이른바 주거 환경 개선 사업을 거쳐 지금의 모습(가운데)으로 바뀌었다. 오른쪽 거대한 녹색 띠가 창덕궁 후원이다. 울창한 후원이 내려다보였어야 할 77번지 언덕의 햇볕조차 들지 않는 골목 안을 들어가 보면(오른쪽), 그간 도시 주거에서 개선이 무엇을 의미해 왔는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다세대 주택이 점령한 도시 

   "주민에게 많이 알리려고 동회에서 전시회도 하고, 학교에서 심포지엄도 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발표하는 날 당시 종로구 국회의원이 나타났어요. 그 누구야, 유명한 사람. 주민들하고 얘기를 하고 있는데, 그 사람이 나서서 바꿔요. 앞으로 전부 다 개발하게 풀어 주겠다고, 표를 얻으려고 딴 데로 몰아가는 겁니다. 건축가들이 공짜로 설계 상담해 준다는 기사가 신문에 나질 않나, 부동산으로 변질을 시켜 버렸어. 그래서 무산되어 버렸어요. 허접한 주택을 짓게 빌미를 준 거죠. 어차피 해제는 해야 된다면, 조금이라도 좋은 쪽으로 안착을 시키려고 했는데… 우리가 의도한 대로 추진되지 못하고 그냥 북촌의 욕망대로 흘러가 버린 겁니다. 지금 원서동이나 가회동에 가면 뜬금 없이 빽빽하게 솟아 있는 5층짜리 빌라들, 그게 그 때 마구잡이로 생긴 겁니다. 우리가 제안한 계획은 한 건물이 고작 2층, 3층이었으니, 주민들이 보기에는 상대적으로 자기 재산을 잃어 버린다고 보였겠죠. 그렇게 나타난 게 지금 북촌에서 아주 잘못된 부분이고, 여전히 그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조성룡, 가회동 11번지 계획의 1층 평면, 1991년. 각각의 집은 왼쪽 아래에서 반원형을 이루며 땅의 가운데로 난 길(진입로)을 공유한다. 어느 집도 입구(빨간 화살표)가 바로 마주보이지는 않는다.
 
 
 

 
   가회동 11번지 

   "지금 중앙고등학교 정문 바로 옆에 보면 큰 은행나무가 있어요. 그 때 서울시에서 대상으로 제시한 땅이 그 왼쪽입니다. 11필지 정도 되는 땅에다가 15세대쯤을 집어넣는 계획이었어요. 과연 북촌답게, 좁은 땅인데도 경사가 굉장히 급했습니다. 옆집하고 불과 한 집 사이가 높이로 한 층 차이가 나는, 이런 땅에서 어떻게 주택을 집합시켜서 지을 수 있는가. 이 때 내가 제안한 건, 이런 개념이예요. 땅의 모양을 따라서 전체 집합의 윤곽이 생긴다면, 양쪽 가장자리에 집을 배치하면서 각 집마다 들어가는 길들을 가운데로 모아서 넓은 길을 내고, 그 길에 이어지게 집집마다 마당을 둡니다. 이런 방식으로 길을 두고 기역자로 된 유니트를 계속 붙여 가는 겁니다. 마당을 낀 기역자로 한 것은 그 전에 이 지역에 있던 한옥을 따른 거예요. 방 세 개에 거실 하나, 지하실이 딸린 자그마한 집들인데요, 이 집들이 다 같은 통로를 쓰게 되는 거죠. 이 하나의 통로는 3층 높이로 된 입체적인 길인데, 각각의 집으로 곧바로 연결되면서도 햇빛은 더 많이 받을 수 있고… 환기를 잘 해결할 방법으로 제안한 겁니다. 지형은 살리면서 형태로 보면 원래 있던 도시형 한옥을 따르고, 다만 이전에는 단층이었지만 3층짜리 저층 연립으로 바꾼 것입니다. 그만한 세대가 들어가야 하니까 이젠 단층 갖곤 안 되는 거죠. 물론 전부 다 이걸로 적용하진 못하겠지만 하나의 시안으로서 제안한 거예요."
 
 
 
 
조성룡, 가회동 11번지 계획의 엑소노메트릭, 1991년. 그림의 왼쪽에 보이는 반원형 진입로로 들어오면 각 층으로 들어가게 된다. 경사진 땅의 모양을 훼손하지 않고 따르는 한편, 다층이면서도 옛 한옥에서처럼 길에서 곧바로 집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했다. 
 
 
 
 
   전통 한옥인가, 전통적 삶의 방식인가

   "북촌을 양옥으로 하는 거? 잘 하면 양옥으로 해도 된다고 생각해. 거기 한옥이라는 것 자체가 건축 양식으로 그렇게 가치가 높다기보다는 공간 구성이 더 중요한 것이고, 그런 식으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도시라는, 집합의 의미가 더 클 것입니다. 각 방의 벽이 곧 담이 되고 그것이 이어져 골목이 생기고, 그러한 집들이 원래 땅의 형상, 전체 지형하고 만나는 관계가 중요한 거거든요. 그 외형이 양옥이냐 한옥이냐는 오히려 그 다음이라고 나는 보는 거죠. 근대기의 전형적인 집장사 한옥으로 이루어진 도심 한복판의 동네를 어떻게 파악할 건가라고 할 때, 그것을 길하고 마당, 그 두 가지 키워드로 본 거예요. 집집마다 작은 마당이 있고, 거기를 거쳐서 길로 연결이 되는데 이 길이라는 게 담이 아니라 방의 연결로 형성된 길, 여러 층짜리 건물이 되더라도 그런 도시형 한옥의 구성 방식을 이어 내면서 해석해 보려고 한 거예요. 앞에 편복도 아파트에서도 그렇듯이, 이런 한옥 마을에서도 자연스럽게 옆 집을 스쳐가게 되죠. 서로 생활을, 공유까진 아니더라도 약간은 개입하게 되는… 사실 아시아선수촌 단지를 계획할 때는 거기까진 생각이 못 미쳤어요. 물론 전통적인 동네를 염두에 두고 덩어리를 나눈다는 정도의 시도는 했습니다만, 여기 가회동에 와서는 정말 하나하나의 작은 유니트 자체, 집이나 방들이 어떻게 도시하고 연결되고 만날 수 있나…. 개인적으로는 도시 주택에 대한 고민의 연장이기도 했습니다. 1989년에 일본에서 전시회(갤러리 마, 도쿄)를 할 때 제가 설계했던 주택들(합정동 주택, 청담동 주택)을 전시하면서 나름대로 이건 주택이라기보다는 엄밀히 ’도시 주택’이라고 말했거든요. 그냥 어떤 하나의 주택, 시골에 있는 전원 주택이 아니라 복잡하고 밀도 높은 도시 속에서 사람이 집을 짓고 살 때 어떻게 하면 그래도 조금이나마 질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주택을 만들 수 있을까. 그 때 도시의 신규 택지들이란 것이 대부분 100평으로 분양되어 나와요. 강남도 마찬가지라서 논현동이나 청담동에서 지금도 그 정도 규모의 주택들이 늘어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100평 기준의 땅에 어떻게 집을 지을 수 있는가를 몇 번 시도하면서 경험을 했고, 그러면서 했던 고민을, 규모는 훨씬 작지만 북촌이라는 마을에 대입한 거죠. 그 고민은 어떻게 하면 전통적인 ㄱ자 집, ㅁ자 집 주택의 공간과 그 공간들이 모인 마을의 생활을 살리면서 지금처럼 자동차로 다니는 도시에서 이웃과 함께 살 수 있을까라는 것이었고, 그 하나의 방식을 제안한 겁니다." (다음 호에 계속)
 
 
 
 
 
조성룡, 가회동 11번지 계획의 모형, 1991년. 각 집들은 양옥이지만 위에서 내려다보면 전통적인 ㄱ자 또는 ㅁ자 한옥의 구성을 그대로 따른다. 녹색으로 칠해진 가운데 마당은 길이자 여러 세대들이 모여 작은 공동체를 형성하는 생활 마당도 되고, 좁은 집들에도 채광과 환기가 고르게 이루어지도록 하는 장치도 된다. 앞에 나온 엑소노메트릭은 가운데 마당 (녹색 부분)에서 반을 자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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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rikszine.korea.ac.kr/front/article/humanList.minyeon?selectArticle_id=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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